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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웃고 떠드는 두 입술의 만남

뱅키호테 2008. 4. 7. 11:12

행복하게 웃고 떠드는 두 입술의 만남

와인 레이블 이야기 <4>

김혁(podoplaza 관장, 와인 칼럼니스트) | 제56호 | 20080405 입력
술을 마시는 데는 999가지 이유가 있지만 술을 마신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은 하나다. 기분이 들뜨고 유쾌해져 말이 많아지고 그만큼 웃음소리도 커진다. 날아다니는 나비인 듯 마주 본 두 개의 입술을 따라 즐거운 시간에 취해 보라.
이탈리아적이다. 무엇이 가장 이탈리아적인가. 꼬집어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이 와인의 레이블을 보고 있으면 이탈리안 냄새가 솔솔 피어난다. 좀 야하기도 하고, 예술적이기도 한 두 사람의 입 또는 한 마리의 나비를 연상하게 만드는 자줏빛 곡선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 브라이다(Braida) 포도원의 최고 와인 ‘아이 수마(Ai Suma)’의 레이블이다.

이 와인의 첫 빈티지는 1989년 아주 우연한 사건에 의해 만들어졌다. 와인을 만든 주인공인 지아코모 볼로냐(Giacomo Bologna)는 러시아 여행에서 알게 된 게오르기아 와인 생산자들을 자신의 포도원으로 초대했다.

이들이 초대에 응한 시기는 89년 10월 말께. 포도를 수확하기에는 좀 늦은 시기였지만 이탈리아 와인 생산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손님들에게 와인 생산 전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해 지아코모는 이들이 도착한 날 함께 포도 수확을 했다. 물론 포도는 충분히 익은 정도를 넘어 있었다.

수확한 포도를 으깨 발효와 숙성에 들어 갔고, 이때 수확해 만든 와인들은 따로 오크통에서 분리해 양조했다. 지아코모와 함께 와인을 만들었던 스태프는 모두 첫 시음 후 지금까지 만들어 왔던 와인과 알코올 정도나 구조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마시기 어려울 거라고 포기하자고 했단다.

그러나 호기심이 많았던 지아코모는 이 와인을 따로 보관했다. 숙성되면서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1년 후 온 가족이 모여 이 문제의 와인을 시음하게 됐는데 모두 이 와인 맛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초창기 이 와인을 숙성하던 통에는 게오르기아인과 함께 수확한 것을 기념해 ‘브라이다 게오르기아(Braida Georgia)’라고 적어 두었지만 1년 뒤 가족과 시음 후 지아코모는 밝은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음, 이만하면 됐어. 우리가 해냈군.” 그래서 이 와인의 이름이 ‘아이 수마(Ai suma: We’ve done it)’가 된 것이다.

이 사건 후 브라이다 포도원은 아이 수마를 만들기 위해 매년 포도가 완숙 이상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확한다. 그러나 이는 포도원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아주 위험한 일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는데 비라도 오는 날에는 그해 아이 수마 농사는 끝장나기 때문이다. 남다른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브라이다 사람들은 그런 위험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위험 요소 때문에 모든 해에 아이 수마가 생산되지는 않는다.

피에몬테 지방에서 최고의 레드 와인은 모두 네비올로(바롤로와 바바레스코 지역)란 품종으로 만든다. 그러나 아이 수마는 한 단계 밑으로 여겨지는 바르베라 품종으로 만든다는 데서 더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재료가 좀 떨어지더라도 인간의 노력으로 최고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와인을 만드는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지아코모는 주변 양조자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텁고, 오랜 시간을 거쳐 어렵게 얻은 양조 경험들을 지역 주민들과 공유함으로써 큰사람이라는 굵은 이미지를 남겼다.

지아코모는 아이 수마라는 드라마틱한 이름을 지어주고, 1990년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이별했다. 포도원은 지금 지아코모의 아들과 딸이 이어가고 있다. 딸 라파엘라는 “아버지는 엄격했지만 근면하셨고, 그래서 가문의 심벌이 ‘새벽에 우는 닭’이었다”고 회상한다.

더불어 매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낙천적인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아버지의 기억을 살려 아이 수마 레이블에는 ‘절대 고독하게 혼자 와인을 마시지 말고 친구들과 즐겁게 떠들며 마실 것’을 권유하는 의미에서 두 개의 입술이 등장한다. 하나는 웃는 입술이고 또 다른 것은 재담을 늘어놓는 입술이다.

그래서 이 레이블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와인을 마시며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이 소리에 배꼽을 쥐고 넘어가는 웃음소리가 함께 들리는 것 같다. 그러다 아이 수마 한잔! 잘 익은 과일 향과 섬세한 맛의 구조가 부드럽게 우리 목구멍을 적시며 흘러간다. 마치 한 마리 나비가 행복의 나라를 향해 날아가는 것처럼.



『김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김혁의 프랑스 와인 명가를 찾아서』『김혁의 이탈리아 와인 기행』의 저자인 김혁씨는 예민하면서도 유쾌한 와인 전문가입니다